'에누리'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본말이라면 거의 무조건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서로 흉허물없는 사람들끼리는 일본말 한 마디쯤 예사로 섞어 쓰면서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부지불식간에 일본말을 쓰고 나서는 매우 무안해 한다. 무슨 대단한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했듯이 주위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정서다. 이러한 일본말 기피 정서는 우리 국민들의 집단 의식이라고 할 만하다.


  서구어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면서도 이웃 나라의 말인 일본어는 벌레 보듯 한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일본말을 썼다면 윤리적인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무안해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민 정서는 일본과 우리 나라 사이에 얽힌 역사적 사실에서 기인할 것이다.


  일본말이 아니고 순수한 우리말인데도 가끔 일본말 취급을 받는 말로 '에누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음운 구성이 일본말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서구어 밀려서 잘 쓰이지 않는다. '디스카운트'라는 영어가 '에누리'를 압도하고 있다. '디스카운트'는 다시 '디시'로 축약되어 대중의 언어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한가위 제수용품 알뜰 구매, '넉넉한 에누리' 기분좋은 덤" 1999년 9월 14일치, 문화일보 27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가볼 만한 수도권 5일장을 안내한 기사였다. 우리의 전통 5일장을 다룬 기사이기에 '에누리'라는 말이 더욱 잘 어울린다. 만약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매장을 다룬 기사였다면 '디스카운트'라는 말을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에누리'는 거의 정반대의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말이다. 흔히 영어의 '디스카운트'에 해당하는 뜻 즉, '할인'의 뜻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 반대의 뜻도 있다.


  이 말은 살 사람이 값을 깎는 일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팔 사람이 실제로 받을 값보다 더 많이 부르는 일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래서 "당신이 너무 에누리를 했으니 나도 에누리를 좀 해야겠소" 하는 말이 성립될 수 있다. 앞의 에누리와 뒤의 에누리는 다른 뜻이다. 이 말은 팔 사람이 받을 값보다 더 많이 부르는 것이 원래의 뜻이었다. 나중에 살 사람이 값을 깎는 것까지 지칭하게 되었고, 그 뒤에는 원래의 뜻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고 나중에 생긴 뜻으로 쓰이다가 요즘에 이르러서는 '디스카운트'라는 서구어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이 말은 물건을 사고 파는 일 외에 대화에서 내용의 가감첨삭을 지칭하기도 한다. 말하는 사람이 사실보다 보태거나 깎아서 하거나, 듣는 사람이 상대방의 말에 보내거나 깎아서 듣는 것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 사람의 말은 약간 에누리해서 듣는 것이 좋다"고 하면 그 사람은 과장이나 은닉이 심하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적당히 감안해서 듣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어감도 '디스카운트'보다 못할 것이 없는데, 서구어 숭배 풍조가 '에누리'라는 좋은 우리말의 목을 죄고 있다.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매장에서도 '디스카운트'라는 말 대신에 '에누리'라는 말을 살려 쓰면 오히려 더 신선한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엠파스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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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5 11:50 2008/12/1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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